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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만 입으면 호두 털이 따라다녔다
검은 옷은 입는 순간 호두 털 전시장이 됐다.
환절기가 되자 온 집 안에 털이 날리기 시작했다. 청소기를 돌려도 돌아서면 또 털 뭉치가 굴러다녔다. 무엇보다 걱정된 건 호두가 그루밍하다 삼킨 털이 뱃속에서 헤어볼로 뭉치는 것이었다. 빗질로 죽은 털을 미리 걷어내주는 게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발톱, 양치, 화장실까지 하나씩 해결해 오면서도 빗질만큼은 계속 미뤄왔다. 호두가 빗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브러시를 들고 다가가기만 해도 슬금슬금 도망갔고, 억지로 몇 번 빗기려 하면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거나 손을 물려고 했다. 특히 등 아래쪽이나 꼬리 근처를 건드리면 예민하게 반응했다.
억지로 빗기다가는 '빗은 싫은 것'으로 굳어질 게 뻔했다. 그래서 발톱과 양치 때 효과를 봤던 방식을 다시 꺼냈다. 아주 잘게 쪼개서, 간식과 함께, 14일 동안 천천히.
온몸 대신 턱 밑 한 군데부터 시작했다
목표를 '온몸 빗기'로 잡지 않았다. 그게 무리라는 건 그동안의 훈련에서 충분히 배웠다. 대신 '빗을 봐도 도망가지 않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빗질은 호두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부터 시작한다. 호두는 턱 밑과 볼, 머리 쓰다듬는 걸 좋아해서 그쪽부터 살살 빗기로 했다. 싫어하는 등 아래나 꼬리는 처음부터 건드리지 않았다.
한 번에 몇 번만 빗고 곧바로 츄르를 준다. 빗질이 끝나자마자 간식이 나와야 빗과 맛있는 게 하나로 연결된다.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바로 멈춘다. 억지로 한 번 더 빗는 것보다, 기분 좋을 때 끝내는 게 다음을 위해 나았다.
빗을 보고 도망가던 호두가 먼저 다가오기까지
첫날은 빗지도 않았다. 브러시를 호두 옆에 놓아두고 냄새만 맡게 한 뒤 간식을 줬다. 빗이라는 물건 자체에 대한 경계부터 풀어주고 싶었다.
그다음 이틀은 좋아하는 턱 밑에 브러시를 살짝 대보고 바로 간식을 줬다. 빗는다기보다 빗으로 쓰다듬는 정도였다. 다행히 턱 밑은 좋아하는 곳이라 크게 거부하지 않았다.
나흘째부터는 볼과 머리를 실제로 몇 번씩 빗기 시작했다. 골골 소리를 내는 걸 보니 이 부위는 오히려 빗질을 즐기는 것 같았다. 죽은 털이 브러시에 조금씩 걸려 나오기 시작했다.
엿새째에 첫 고비가 왔다. 조심스럽게 등 위쪽까지 넓혀봤는데, 등 중간쯤 오니 몸을 살짝 틀었다. 무리하지 않고 다시 좋아하는 부위로 돌아가 마무리하고 간식을 줬다.
여드레째쯤엔 브러시를 들어도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간식을 기대하는지 먼저 다가오는 날도 생겼다. 빗이 나오면 간식도 나온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았다.
열흘째가 넘어가자 등 위쪽까지는 무난하게 빗을 수 있었다. 털이 제법 뭉텅이로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등 아래쪽과 옆구리는 몇 번 이상 빗으면 여전히 예민해졌다.
열이틀째부터는 옆구리도 조금씩 시도했다. 짧게 몇 번씩, 싫어하기 직전에 멈추기를 반복하니 참아주는 시간이 조금씩 늘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턱, 볼, 머리, 등 위쪽은 확실히 편하게 빗을 수 있게 됐다. 꼬리와 배는 여전히 거부하지만, 빗만 봐도 도망가던 처음을 생각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빗 하나 바꿨을 뿐인데 시간이 확 줄었다
2주 동안 지켜보며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을 배웠다.
부위마다 반응이 극과 극이었다. 턱, 볼, 머리 같은 얼굴 주변은 원래 고양이들이 서로 비벼대는 곳이라 빗질을 좋아했고, 등 아래와 꼬리, 배는 방어 본능이 강한 곳이라 끝까지 예민했다. 좋아하는 부위부터 시작한 게 신의 한 수였다.
빗을 바꾼 것도 생각보다 컸다. 원래는 원목 손잡이의 일반 브러시를 썼는데, 죽은 속털이 잘 안 걷혀서 빗질을 오래 해야 했다. 오래 붙잡혀 있으니 호두는 더 싫어했다. 그러다 한쪽은 엉킨 털을 풀고, 한쪽은 속털을 걷어내는 양면 빗으로 바꿨더니 짧은 시간에 죽은 털이 훨씬 많이 나왔다. 빗질 시간이 줄어드니 호두의 거부감도 덩달아 줄었다.
다만 이 빗은 주의할 점도 있었다. 금속 날이 있어서 힘줘서 당기면 피부가 자극받을 수 있다. 그래서 절대 세게 빗지 않고, 털이 난 방향으로 아주 살살 훑듯이 빗었다. 속털을 걷어내는 힘이 워낙 세서 매일보다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가 적당했다.
날씨도 영향을 줬다. 건조한 날엔 빗질할 때 정전기가 튀어서 호두가 움찔했다. 빗기 전에 손에 물기를 살짝 묻혀 털을 쓸어주니 조금 나았다.
빗질하다 보니 뜻밖의 장점도 있었다. 빗기면서 자연스럽게 피부 상태를 살피게 된 것이다. 비듬이 심하거나 붉은 반점, 상처, 혹, 벼룩 흔적 같은 게 없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게 보인다면 단순한 털 관리 문제가 아닐 수 있으니 병원에서 확인해 보는 게 좋다.

배와 꼬리는 아직 허락받지 못했다
온몸을 완벽하게 빗는 고양이로 만들진 못했다. 지금도 배와 꼬리는 거부하고, 컨디션 안 좋은 날은 얼굴 주변만 겨우 빗는 날도 있다.
그래도 빗만 보면 도망가던 호두가 이제는 빗질을 간식이 따라오는 기분 좋은 일로 받아들인다. 날리는 털도 확실히 줄었다. 무엇보다 빗질하는 시간이 숙제가 아니라 서로 교감하는 시간이 됐다.
요즘 우리 집 빗질은 턱 밑에서 시작해서 턱 밑에서 끝난다. 호두의 골골 소리를 들으면서. 배와 꼬리는 언젠가 허락해 주는 날이 오겠지 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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