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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틀기도 전에 전쟁이 시작됐다
목욕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록, 호두는 구석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날은 호두가 어디선가 끈적한 무언가를 잔뜩 묻히고 온 날이었다. 혀로 핥아서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씻겨야 했다. 고양이 전용 샴푸까지 미리 사두고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목욕을 시켰는데,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문제는 물을 틀기도 전부터였다. 욕실에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호두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욕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도망 다니기 바빠서, 붙잡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겨우 잡아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목욕하는 내내 야옹야옹 쉴 새 없이 울어댔다. 평소엔 안 내던 다급한 소리였다. 물이 몸에 닿을 때마다 발버둥은 더 심해졌고, 나는 나대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겨우 샴푸를 헹구고 수건으로 감쌌지만, 호두는 그 뒤로 한동안 구석에 숨어버렸다.
발톱, 양치, 빗질까지 하나씩 적응시키며 나름 베테랑 집사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목욕 앞에서는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찾아보고 나서야 알았다, 고양이는 목욕이 거의 필요 없다는 걸
그날 이후 자료를 찾아보다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건강한 단모종 고양이는 사실 목욕이 거의 필요 없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스스로 그루밍으로 몸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데다, 물을 극도로 싫어하는 동물이다.
오히려 자주 씻기면 피부에 필요한 유분까지 씻겨 나가 피부병이나 건조증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호두처럼 털이 짧은 실내 고양이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굳이 목욕을 안 해도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목욕을 영영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날처럼 뭔가 심하게 묻거나, 나이가 들어 스스로 그루밍하기 어려워지거나, 피부 치료 때문에 약욕이 필요한 날은 언젠가 온다. 그때 또 그런 전쟁을 치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목표를 바꿨다. 자주 씻기는 게 아니라, 언젠가 꼭 필요한 그날을 위해 물과 욕실에 대한 두려움을 미리 줄여두기로 했다. 한 달에 걸쳐 아주 천천히.
이번엔 물보다 욕실부터 친해지기로 했다
첫 목욕을 돌아보니 문제가 분명했다. 애초에 욕실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무서웠으니, 그 안에서 얌전히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겁먹은 호두를 붙잡아 다짜고짜 물부터 끼얹으려 했던 것이다. 도망 다니고 울부짖을 수밖에.
이번엔 발톱과 양치 때처럼 아주 잘게 쪼갰다. 욕실이라는 공간과 친해지기, 물 없는 욕조에 들어가 보기, 발만 물에 담가보기, 몸에 미지근한 물 조금 적셔보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짧게 헹궈보기.
규칙은 늘 같았다. 한 단계를 무서워하지 않으면 바로 간식을 주고, 심하게 거부하면 절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한 단계에 며칠이 걸리든 상관없었다.
욕실 문턱에서 욕조 안까지, 한 걸음씩
첫 주, 욕실에서 간식 먹는 날이 왔다
첫 주는 물 근처에도 안 갔다. 그날 욕실에서 그렇게 도망 다녔던 걸 떠올리며, 이번엔 욕실을 편한 공간으로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문을 열어두고 안에서 간식을 주거나 장난감으로 놀아줬다. '무서운 곳'이었던 욕실을 '간식이 나오는 곳'으로 조금씩 바꿔주고 싶었다.
처음엔 욕실 근처만 가도 경계하더니, 사나흘쯤 지나자 제 발로 들어와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도망 다니기 바빴던 그 공간에 스스로 들어온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었다.
둘째 주, 매트 한 장에 욕조가 편해졌다
물 없는 욕조 안에 간식을 놓아 들어가 보게 했다. 미끄러운 바닥을 싫어할까 봐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아줬더니 훨씬 안정감 있어했다. 며칠 반복하니 욕조 안에서도 간식을 먹을 만큼 편해졌다.
셋째 주, 발끝이 물에 닿기까지
이제 물을 아주 조금 꺼냈다. 욕조 바닥에 미지근한 물을 발목이 겨우 잠길 정도로만 받고, 발이 닿게 했다. 첫날은 발이 닿자마자 빼려 했지만, 억지로 잡지 않고 잠깐 닿기만 해도 간식을 줬다.
진도가 더뎌서 좀 답답했지만, 물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데 가장 중요한 주였다.
마지막 주, 울부짖지 않고 짧게 헹궈냈다
컵이나 손으로 미지근한 물을 다리와 등 아래쪽에 조금씩 적셔봤다. 얼굴과 귀, 머리는 물이 닿으면 특히 질색하니까 처음부터 목표에서 뺐다. 물을 적신 뒤엔 바로 수건으로 감싸 안심시키고 간식을 줬다.
마지막 며칠은 아주 짧게, 등과 다리만 미지근한 물로 헹궈봤다. 그날처럼 도망 다니거나 다급하게 울부짖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좋아하진 않았지만, 붙잡느라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발전이었다.
목욕보다 말리는 게 더 큰 일이었다
한 달을 해보니 직접 겪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물 온도가 정말 중요했다. 사람에겐 미지근해도 고양이에겐 차갑거나 뜨겁게 느껴질 수 있다. 사람 체온과 비슷한 미지근한 물이어야 그나마 덜 놀랐다. 첫 목욕 때는 이걸 신경도 안 썼다.
미끄럼 방지 매트 하나가 두려움을 크게 줄였다. 그날 그렇게 도망 다녔던 이유 중 하나는 발이 미끄러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불안이었던 것 같다. 얼굴에는 물을 묻히지 않는 게 핵심이었다. 귀에 물이 들어가면 염증이 생길 수 있고, 얼굴에 물이 닿는 순간 대부분 패닉이 온다. 얼굴은 젖은 수건으로 살살 닦는 정도면 충분했다.
샴푸는 반드시 고양이 전용을 써야 한다. 사람이나 강아지 샴푸는 산도(pH)가 달라 고양이 피부에 자극이 될 수 있다. 목욕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트레스도 커지니, 샴푸를 미리 물에 살짝 풀어두는 식으로 헹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게 좋았다.
그리고 사실 목욕보다 더 큰 일은 말리기였다. 젖은 채로 두면 체온이 떨어지고 감기에 걸릴 수 있어서 잘 말려야 하는데, 드라이기 소리를 무서워하는 고양이가 많다. 호두도 드라이기를 질색해서, 수건으로 최대한 물기를 꾹꾹 눌러 닦은 뒤 따뜻한 곳에서 자연건조하는 쪽을 택했다. 드라이기를 쓴다면 약한 바람으로 멀리서부터 조금씩 익숙해지게 해야 한다.
호두는 여전히 목욕을 싫어하고, 나도 자주 씻길 생각은 없다
한 달 만에 목욕을 즐기는 고양이가 되진 않았다. 애초에 그건 목표도 아니었다. 호두는 단모종이라 목욕이 자주 필요 없고, 나도 굳이 자주 씻길 생각이 없다. 목욕을 자주 안 시킨다고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중요한 건 언젠가 정말 씻겨야 할 날이 왔을 때, 최소한 패닉 없이 견딜 수 있도록 준비해 둔 것이다. 이 한 달의 진짜 목표는 그거였고, 어느 정도는 이뤘다고 생각한다.
첫 목욕 날엔 끝나고도 한참을 구석에서 나오지 않던 호두가, 이번엔 수건에 싸인 채 간식을 받아먹었다. 목욕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니어도, 적어도 욕실이 더는 도망쳐야 하는 곳은 아니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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