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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흩어진 슬리퍼 조각을 보고 아찔했다
그 무렵 우리 집 현관에는 멀쩡한 슬리퍼가 한 켤레도 없었다.
어느 날부터 호두가 슬리퍼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특히 푹신한 실내 슬리퍼를 좋아했는데, 앞코를 앞발로 감싸 쥐고 뒷발로 캉캉 차면서 이빨로 물어뜯었다. 사냥할 때 쥐를 잡는 딱 그 동작이었다. 슬리퍼 표면은 너덜너덜해졌고, 심할 땐 작은 조각이 뜯겨 나왔다.
손 무는 버릇이며 새벽 습격까지 사냥 놀이로 하나씩 잡아왔는데, 엉뚱한 곳에서 새 문제가 터진 것이다.
처음엔 슬리퍼 하나 망가지는 거야 뭐 하고 넘겼다. 그런데 어느 날 뜯긴 조각이 바닥에 흩어진 걸 보고 아찔했다. 저걸 삼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물건이 상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칫 이물을 삼켜 위험해질 수 있는 문제였다.
혼내봤자 소용없다는 건 그동안의 훈련에서 충분히 배웠다. 무는 건 본능이니, 그 욕구를 슬리퍼가 아닌 안전한 다른 걸로 옮겨주기로 했다.

캣닢 인형엔 냄새만 맡고 돌아섰다
처음엔 흔히들 추천하는 캣닢 장난감을 떠올렸다. 그런데 막상 줘보니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호두는 캣닢에 반응이 거의 없었다. 킁킁 냄새만 맡고는 시큰둥하게 돌아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꽤 많은 고양이가 타고나기를 캣닢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호두가 딱 그런 경우였다. 캣닢은 통하는 고양이에겐 좋지만, 안 통하는 아이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향에 기대는 대신, 슬리퍼를 물 때의 그 감각을 대신할 물건을 찾기로 했다. 마침 집에 있던 적당한 크기의 봉제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슬리퍼처럼 앞발로 감싸 안고 뒷발로 차며 마음껏 물어뜯어도 되는, 딱 그런 물건이었다.
슬리퍼는 숨기고, 인형은 안겨주기로 했다
방법은 단순하게 잡았다.
슬리퍼는 아예 눈에 안 띄게 치운다. 신발장 안이나 문 닫힌 곳에 넣어서, 물고 싶어도 물 슬리퍼가 없게 만든다.
슬리퍼를 물려는 낌새가 보이면 바로 봉제 인형을 안겨준다. 물고 싶을 땐 인형을 물면 된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이다.
인형을 신나게 물고 차면 그대로 놀이를 이어간다. 인형이 슬리퍼보다 훨씬 재밌다는 걸 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슬리퍼에 하던 발차기를 인형에 하기 시작했다
첫날은 일단 슬리퍼를 전부 치웠다. 물 게 없어진 호두가 현관 근처를 서성이며 두리번거렸다. 이때 봉제 인형을 안겨주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 앞발로 잡았다.
이튿날에도 여전히 슬리퍼를 찾는 눈치였다. 신발장 앞에서 냄새를 맡을 때마다 인형을 코앞에서 흔들어 관심을 돌렸다. 인형을 물기 시작하면 칭찬해 줬다.
사흘째에 변화가 보였다. 앞발로 감싸고 뒷발로 차는, 슬리퍼에 하던 바로 그 동작을 인형에 하기 시작했다. 물어뜯는 대상이 옮겨가는 게 눈에 보였다.
나흘째엔 심심하면 스스로 인형을 찾아 물었다. 슬리퍼를 찾는 일이 확 줄었다.
닷새째엔 시험 삼아 슬리퍼를 잠깐 꺼내놔 봤다. 다가가 냄새는 맡았지만 예전처럼 격하게 물어뜯진 않았다. 대신 곁에 있던 인형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엿새째가 되자 인형이 확실히 호두 전용 사냥감이 됐다. 물고 차는 강도가 예전에 슬리퍼에 하던 수준까지 올라왔다. 그만큼 인형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슬리퍼를 꺼내둬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고 싶을 땐 알아서 인형을 찾았다. 일주일 만에 물어뜯는 대상을 거의 바꾼 셈이다.
인형이 통한 건 슬리퍼와 감각이 닮아서였다
일주일을 해보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다.
환경을 바꾸는 게 절반이었다. 아무리 인형을 줘도 슬리퍼가 눈앞에 있으면 소용없었다. 물 대상을 치워버리니 자연스럽게 인형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유혹부터 없애는 게 먼저였다.
대신할 물건은 같은 감각을 줘야 통했다. 호두가 슬리퍼를 물던 건 앞발로 감싸고 뒷발로 차기 좋은 크기와 질감 때문이었다. 봉제 인형이 딱 그 감각을 대신해 줬기에 통했다. 감각이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면 안 됐을 것이다.
남들이 좋다는 방법이 우리 아이에게도 맞으라는 법은 없었다. 많은 글에서 캣닢을 추천하지만, 호두처럼 반응이 없는 고양이도 많다. 결국 내 고양이를 직접 지켜보면서 맞는 걸 찾는 수밖에 없다.
안전 이야기는 꼭 덧붙이고 싶다. 대신 주는 봉제 인형도 관리가 중요하다. 눈알이나 코 같은 작은 부속이 달린 인형은 뜯어서 삼킬 위험이 있으니 피하거나 미리 떼어내는 게 좋다. 솜이 밖으로 나올 만큼 망가지면 새것으로 바꿔줘야 한다. 슬리퍼 조각이든 인형 솜이든 삼키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뭔가 삼킨 것 같다면 지체 없이 병원에 가야 한다.
물어뜯는 버릇은 그대로, 대상만 바뀌었다
솔직히 말하면 물어뜯는 습성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그 욕구를 슬리퍼에서 인형으로 옮겼을 뿐이다.
그래도 그거면 충분했다. 물어뜯는 본능을 없앨 순 없으니, 안전한 대상으로 옮겨주는 게 현실적인 최선이었다. 덕분에 슬리퍼도 지키고, 무엇보다 이물을 삼킬 위험을 크게 줄였다.
이제 현관에 슬리퍼를 꺼내둬도 호두는 냄새 한 번 맡고 지나간다. 대신 거실 어딘가에서 앞발에 감싸 안긴 채 발차기를 당하는 인형 하나가, 요즘 우리 집에서 제일 고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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