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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지 않으니 이번엔 소파가 남아나질 않았다
소파 모서리에서 실밥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는 걸 본 날, 한숨부터 나왔다.
손 무는 버릇과 새벽 습격은 그동안의 훈련으로 어느 정도 잡은 참이었다. 그런데 에너지가 엉뚱한 데로 새기 시작했다. 바로 소파 긁기였다.
낚싯대 놀이로 사냥 본능은 풀어줬지만, 긁고 싶은 욕구는 또 별개였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오래된 패브릭 소파 모서리가 어느 날 보니 실밥이 다 터져 있었다. 처음엔 화가 났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혼낼 일이 아니라 긁을 곳을 제대로 만들어주지 않은 내 탓이었다.
사실 우리 집에 스크래처가 없었던 건 아니다. 종이 스크래처가 하나 있었는데, 호두가 거의 쳐다도 안 봤다. 혹시 재질이 안 맞아서 안 쓰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종이, 밧줄, 카펫 세 가지 재질의 스크래처를 놓고 호두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직접 비교해 보기로 했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놓아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최대한 공정하게 비교하려고 신경 썼다.
먼저 세 스크래처를 거실 한 공간에 비슷한 간격으로 동시에 놓았다. 하나씩 차례로 놓으면 신기해서 쓰는 건지 정말 좋아서 쓰는 건지 구분이 안 되니까.
처음 며칠은 캣닢 같은 유도 없이 반응만 지켜봤다. 순수하게 어떤 재질에 먼저 발을 대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스크래처마다 하루 몇 번 발톱을 가는지, 어떤 자세로 긁는지를 대충이라도 적어두었다.
준비한 건 원래 있던 납작한 종이 스크래처, 기둥형 밧줄 스크래처, 바닥에 까는 카펫 스크래처 이렇게 셋이었다.

재질마다 호두의 반응이 이렇게 다를 줄 몰랐다
원래 있던 종이 스크래처는 역시나 찬밥이었다
원래 있던 거라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역시나였다. 냄새는 맡는데 발톱을 세워 긁는 일은 드물었다. 어쩌다 긁어도 몇 번 슥슥 하다 말았다.
한 가지 알게 된 건, 종이 스크래처를 눕혀두면 거의 안 쓰고 살짝 경사지게 세워두면 그나마 반응이 있었다는 점이다. 재질보다 각도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다만 종이 부스러기가 계속 떨어져서 청소가 번거로웠다.
밧줄 기둥 앞에서는 첫날부터 벅벅 긁었다
셋 중 반응이 가장 뜨거웠다. 기둥형이라 몸을 쭉 펴고 서서 긁을 수 있는 게 컸던 것 같다. 놓은 첫날부터 앞발을 높이 뻗어 위아래로 벅벅 긁었고, 하루에도 여러 번 지나가다 습관처럼 긁었다.
특히 아침에 일어나서, 그리고 놀이 직전에 스트레칭하듯 긁는 모습이 뚜렷했다. 이 밧줄 스크래처를 놓고 나서 소파를 긁는 일이 확실히 줄었다. 다만 사이잘 밧줄이 조금씩 풀리면서 실이 뜯겨 나왔다. 몇 달 쓰면 윗부분부터 헐거워질 것 같다.
카펫 패드는 긁기보다 뒹구는 자리가 됐다
카펫 스크래처는 반응이 애매했다. 세워서 긁기보다는 바닥에 깔아 두니 그 위에 앉거나 뒹구는 데 더 많이 썼다. 발톱을 간다기보다 몸을 문지르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재밌는 건, 소파를 긁을 때 자세와 카펫을 긁을 때 자세가 비슷했다는 점이다. 호두에게는 수평으로 긁는 것과 수직으로 긁는 것 둘 다 필요했고, 소파가 그중 수평 쪽 욕구를 채워주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카펫 스크래처가 그 역할을 어느 정도 대신해 줬다.
알고 보니 재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셋을 동시에 비교하면서 예상 못 한 걸 몇 가지 배웠다.
제일 의외였던 건, 고양이가 재질보다 '자세'와 '위치'에 더 민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밧줄이라도 세워뒀을 때와 눕혔을 때 반응이 달랐고, 거실 한복판처럼 늘 지나다니는 자리에 둔 스크래처를 훨씬 잘 썼다. 구석에 처박아두면 좋은 재질이어도 안 썼다.
한 가지 재질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호두는 수직으로 긁고 싶은 욕구(밧줄)와 수평으로 긁고 싶은 욕구(카펫)가 둘 다 있었다. 그래서 결국 밧줄 기둥과 카펫 패드를 둘 다 두는 걸로 정착했다.
캣닢은 처음에 관심을 끄는 용도로만 쓸모가 있었다. 관심 없던 스크래처에 캣닢을 살짝 뿌려주니 다가가긴 했는데, 재질이 안 맞으면 캣닢 효과가 사라진 뒤엔 다시 안 썼다. 결국 재질 궁합이 먼저였다.
지금 우리 집 거실엔 스크래처가 두 개 서 있다
한 달 남짓 지켜본 결과, 호두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면 밧줄 > 카펫 > 종이 순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호두의 취향일 뿐, 모든 고양이에게 통하는 정답은 아닐 것이다.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소파를 긁는 게 나쁜 버릇이 아니라 마땅히 긁을 곳이 없다는 신호였다는 점이다. 재질을 다양하게 놓아주고, 잘 보이는 자리에 세워주고, 수직과 수평 욕구를 둘 다 채워주니 소파 피해가 눈에 띄게 줄었다.
요즘 호두가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 켜듯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은 소파 모서리가 아니라 거실 한가운데 세워둔 밧줄 기둥이다. 결국 호두는 처음부터 소파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긁기 좋은 곳이 거기밖에 없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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