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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장을 꺼내면 호두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이동장이 나오면 병원에 간다. 호두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패닉에 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확실히 싫어했다. 이동장을 꺼내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고, 억지로 넣으려 하면 버티며 저항했다. 아직 무서워하는 것까진 아니고, 그냥 싫은 정도였다.
문제는 이 '그냥 싫은 것'이 방치하면 진짜 공포가 된다는 것이다. 이동장을 병원 갈 때만 꺼내니, 호두에겐 '이동장 = 병원 = 무서운 곳'이라는 공식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발톱, 양치, 목욕을 하나씩 적응시키면서 느낀 게 있다. 완전히 싫어하게 되기 전에 미리 손을 쓰는 게 훨씬 쉽다는 것. 이동장도 지금이 그때였다. 이동장 적응은 단순히 편하자고 하는 게 아니다. 이동장을 무서워하면 병원에 데려가는 것 자체가 전쟁이 되고, 아파서 급히 가야 하는 날엔 그 실랑이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꼭 해두고 싶었다.

병원 갈 때만 꺼내던 이동장을 거실에 내놓았다
호두가 이동장을 싫어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평소엔 안 보이다가, 나타나기만 하면 병원에 끌려간다는 것. 이동장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불길한 신호였다.
그래서 생각을 뒤집었다. 필요할 때만 꺼내는 물건이 아니라, 늘 거실 한구석에 놓여 있는 익숙한 가구, 나아가 편히 쉬는 숨숨집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동장은 치우지 않고 늘 같은 자리에 둔다. 우리 집 이동장은 위아래가 분리되지 않고 앞문만 열리는 형태라, 그 문을 활짝 젖힌 뒤 다시 닫히지 않게 고정해 뒀다.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안에는 포근한 담요와 간식을 넣어둔다. 이동장 안이 '좋은 게 있는 곳'이 되게.
그리고 절대 억지로 넣지 않는다. 스스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린다. 이 2주 동안은 병원 갈 일이 없기를 바라며 억지로 넣는 일은 아예 하지 않기로 했다.
간식만 물고 나오던 호두가 그 안에서 낮잠을 자기까지
첫 주, 문을 활짝 열어두고 기다렸다
처음 이틀은 이동장을 거실 한구석에 두고 앞문을 활짝 열어 고정했다. 문이 어중간하게 걸쳐 있으면 갇힐까 봐 경계할 수 있어서, 아예 걸리적거리지 않게 완전히 젖혀뒀다. 안에는 평소 쓰던 담요를 깔고 간식을 몇 개 넣었다. 호두는 근처만 어슬렁댔다.
사나흘째가 되자 안에 둔 간식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오래 머물진 않고 간식만 잽싸게 물고 나왔지만, 이동장 안에 발을 들인 것 자체가 진전이었다.
닷새째부터는 간식을 먹고 바로 나오는 대신, 안에 잠깐 앉아 있는 시간이 생겼다. 담요가 포근했는지 그 안에서 그루밍을 하기도 했다. 이동장이 무섭다는 생각이 조금씩 옅어지는 게 보였다.
둘째 주, 이동장이 호두의 아지트가 됐다
여드레째쯤부터 안에 머무는 시간이 확실히 늘었다. 지붕이 있는 구조라 그런지, 오히려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린 이동장 안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열하루째엔 놀랍게도 스스로 들어가 낮잠을 잤다. 병원 가는 무서운 물건이 아니라, 쉬고 싶을 때 찾는 아지트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는 호두가 안에서 편히 쉬고 있을 때 문을 아주 잠깐 닫았다가 바로 여는 연습도 시작했다.
마지막 날엔 문을 닫아도 잠깐은 얌전히 있었고, 열어주면 편하게 걸어 나왔다. 완벽하진 않지만, 2주 전 이동장을 피해 다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무서웠던 건 이동장이 아니라 이동장이 나오는 날이었다
2주 동안 지켜보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이동장을 늘 그 자리에 두는 게 핵심이었다. 필요할 때만 나타나니 무서웠던 거다. 늘 거기 있는 익숙한 물건이 되자 호두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공간으로 받아들였다. 이것 하나만 바꿔도 절반은 성공이었다.
문을 확실히 열어 고정하는 것도 중요했다. 위아래가 분리되지 않는 이동장은 앞문이 유일한 출입구라, 문이 어정쩡하게 걸쳐 있으면 드나들다 갇힐까 봐 불안해한다. 문을 완전히 젖혀 고정하니 안심하고 드나들었다. 지붕 있는 구조는 오히려 아늑한 은신처처럼 느끼는 데 도움이 됐다.
기다림이 가장 큰 무기였다. 스스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린 게 신의 한 수였다. 억지로 한 번이라도 넣었다면 '역시 이동장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만 굳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병원에 갈 때 쓸 만한 팁도 하나 있다. 이동장에 평소 쓰던 담요, 즉 호두 냄새가 밴 걸 그대로 넣어주면 낯선 병원에서도 자기 냄새 덕분에 조금 안정을 찾는다. 이동하는 동안엔 이동장을 얇은 천으로 덮어 바깥이 덜 보이게 해 주면 불안이 줄어든다. 이런 것도 평소에 이동장에 익숙해져 있어야 효과가 있다.
이제 우리 집엔 이동장을 '꺼내는' 날이 없다
이동장을 사랑하는 고양이가 된 건 아니다. 문을 오래 닫아두면 여전히 답답해하고, 실제로 병원 가는 날엔 또 나름의 스트레스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동장이 피해 다녀야 하는 무서운 물건에서 가끔 쉬러 들어가는 익숙한 공간으로 바뀐 것만으로도 이 2주는 충분히 값졌다. 언젠가 급하게 병원에 가야 하는 날, 이 준비가 소중한 시간을 지켜줄 거라고 믿는다.
이제 우리 집엔 이동장을 '꺼내는' 날이 없다. 늘 거실 한구석에 문이 열린 채 놓여 있고, 가끔 그 안에서 호두가 자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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