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는데, 그게 슬퍼서가 아니라 뭔가 가슴 한쪽이 묘하게 차 있어서였습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라길래 차갑고 무거울 줄 알았는데, 직접 보고 나니 생각보다 훨씬 따뜻한 이야기였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시도라는 거창한 설정 안에 사실은 아주 단순한 질문이 숨어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버틸 수 있을까,라는 질문 말입니다.
버디무비 구조가 만들어낸 감정의 층위
저도 처음엔 이 영화를 마션 스타일의 우주 생존물로 생각했습니다. 기억을 잃은 채 홀로 우주선에서 깨어나는 주인공, 죽어있는 동료들, 그리고 혼자 해결해야 하는 위기. 딱 그 설정까지 보면 장르적으로 비슷한 결이 맞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짜 하려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여기서 버디무비(Buddy Movie)란 두 캐릭터가 서로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을 중심 서사로 삼는 장르를 말합니다. 단순한 우정 이야기가 아니라, 두 존재가 충돌하고 교감하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구조입니다. 이 영화는 그 구조를 외계 생명체와의 첫 접촉, 즉 퍼스트 컨택트(First Contact) 서사에 정확히 꽂아 넣었습니다. 퍼스트 컨택트란 인류가 처음으로 외계 문명과 만나는 상황을 다루는 SF 하위 장르로, 그 설정 자체가 가진 두려움과 경이감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핵심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외계 생명체 로키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시간이 절대 낭비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라이언 고슬링이 혼자 허우적거리고, 혼잣말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그 반복되는 장면들이 쌓이면서 관객도 같이 고립됩니다. 그 고립감이 충분히 쌓인 뒤에야 로키가 등장하는데, 그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안도감이 올라왔습니다. 돌멩이처럼 생긴 거미형 외계 생명체한테 안도감을 느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각본을 맡은 드류 고다드는 마션의 각본을 쓴 인물이고, 연출은 필 로드와 크리스 밀러가 담당했습니다. 이 둘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시리즈의 각본으로 잘 알려진 팀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방향은 원작 소설에서 70%를 차지하는 주인공의 머릿속 과학 계산을 덜어내고, 대신 그레이스와 로키의 관계를 서사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원작 팬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는 선택이지만, 저는 이 결정이 영화를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열린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서사적 장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고립 상태를 충분히 쌓은 뒤 로키를 등장시켜 관객이 외계 존재에게 감정 이입하게 만든 구조
- 플래시백을 통해 그레이스가 왜 혼자인지, 왜 외로운 사람인지를 서서히 드러내는 방식
- 로키를 CGI가 아닌 애니매트로닉스(Animatronics)로 구현한 점. 애니매트로닉스란 실제로 움직이는 기계 장치로 생명체를 표현하는 기술로, 디지털 합성보다 배우와의 물리적 상호작용이 가능해 연기의 실재감이 올라갑니다.
라이언 고슬링의 원맨쇼, 그리고 아쉬움
제가 경험상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라이언 고슬링이 이 정도 분량을 거의 혼자 소화한다는 게 쉽게 상상이 안 됐습니다. 제한된 세트 공간, 상대 배우도 없는 상황, 그것도 2시간 40분짜리 영화에서 말입니다. 직접 보고 나서야 왜 이 역할을 그가 코로나 시기부터 끈질기게 기다렸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고슬링의 연기 방식은 과잉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이걸 업계 용어로는 미니멀리즘 연기(Minimalist Acting)라고 부르는데,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스스로 감정을 채워 넣게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극단적 위기 속에서도 나른하고 약간 비틀린 유머 감각을 유지하는 그레이스 캐릭터가 이 연기 방식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위태롭고, 그래서 오히려 더 응원하게 되는 캐릭터였습니다.
다만 솔직히 이건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위기 상황의 해결 과정이 비교적 빠르게 정리되는 장면들에서, 긴장감이 충분히 쌓이기 전에 국면이 전환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야기가 매끄럽게 흘러간다는 건 장점이지만, 동시에 울퉁불퉁한 질감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스트로 파지(Astrophage)라는 태양 에너지를 먹고 증식하는 정체불명의 우주 미생물이라는 설정만 해도,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면 이야기가 훨씬 단단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학적 설정이 서사의 도구로 활용되는 건 이 장르의 특성상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가장 인상에 남는 SF 영화들은 과학적 디테일이 단순히 배경으로 머물지 않고 인물의 선택과 감정에 직접 맞닿아 있을 때였습니다. 이 영화는 그 지점에서 절반 정도는 성공했다고 봅니다.
영화의 IMAX 촬영 비율은 전체 상영 시간의 절반을 훌쩍 넘습니다. IMAX란 일반 극장 화면보다 최대 40% 더 넓은 화면비와 높은 해상도를 제공하는 대형 포맷 상영 방식을 말합니다. 조명 트릭과 세트 미술이 정교하게 맞물리는 장면들은 이 포맷에서 확실히 다른 무게감을 줍니다. 관람 포맷을 고민 중이라면 IMAX를 권합니다. 실제로 보고 나서 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꼈습니다.
영화 산업 전반에서 오리지널 SF 블록버스터의 흥행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분석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 시리즈 속편이나 IP 기반 작품이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독점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그런 흐름 속에서 이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관객과 정면 승부를 시도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주목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The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는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통해 작품성을 공인하는 기관인데, 이 영화는 각색상과 작품상 후보군으로 충분히 거론될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줍니다(출처: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제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적어도 노미네이트는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이 영화에서 제가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화려한 우주 시퀀스가 아니었습니다. 전혀 다른 존재 두 개가 서로를 이해하려고 조금씩 노력하는 장면, 그 지극히 평범한 과정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게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가능하면 IMAX로 먼저 경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보고 나서 한동안 조용히 생각에 잠기게 되는 영화입니다. 그 여운이 꽤 오래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