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틀기 전까지만 해도 꽤 들뜬상태였습니다. 브루스 윌리스 이름 석 자만 보고, 점심 먹기 전 노트북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이 하드 시절의 그 시원한 액션을 기대하면서요. 결과는, 기대와 조금 달랐습니다.
줄거리: 단순하지만 굴러가는 이야기
포트리스 더 벙커의 줄거리는 군더더기 없이 단순합니다. 암호화폐 거래소를 운영하던 아들 폴이 사업 위기로 돈이 필요해지면서, 3년째 연락이 끊긴 아버지를 수소문해 찾아갑니다. 아버지 로버트는 전직 CIA 요원으로, 숲 속의 비밀 리조트에 조용히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폴이 미행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의 오랜 숙적 발라지가 부하들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부자는 첨단 무기와 강철 벽으로 무장한 비밀 벙커로 피신하게 됩니다.
이야기 구조 자체는 고전적인 시즈 스릴러(Siege Thriller) 형식입니다. 시즈 스릴러란 주인공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외부의 적을 막아내는 방어전 구조를 말하는데, 포트 아파치나 다이 하드처럼 좁은 공간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직접 봐보니, 이 공식은 어느 정도 작동하긴 했습니다. 벙커 안팎을 오가는 총격전은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초반 30분은 나름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예상 밖으로 전개되는 구간이 거의 없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어떤 방식으로 위기를 넘길지가 화면을 보기 전에 이미 그려졌습니다. 중반부터는 시계를 한 번씩 확인하게 되더라고요.

브루스 윌리스: 화면 속 그 모습이 마음에 걸린 이유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브루스 윌리스를 빼놓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틀었던 이유 자체가 그였으니까요.
직접 겪어보니, 화면 속 그는 제가 기억하는 그 사람과 많이 달랐습니다. 시원하게 뛰고, 재치 있는 대사를 내뱉으며 상황을 주도하던 모습 대신, 조용히 한자리에 앉아 짧은 대사를 읊는 장면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캐릭터 설정인 줄 알았습니다. 은퇴한 CIA 요원이니까 묵직하게 가는 거라고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배경 사정을 찾아보니, 그 시기 윌리스는 실어증(Aphasia) 진단을 받고 은퇴를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실어증이란 뇌 손상으로 인해 언어를 이해하거나 표현하는 능력이 저하되는 신경학적 장애로, 배우에게는 연기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조건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다시 화면을 떠올리니,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라 진짜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 집계 기준으로 이 작품의 평론가 지수는 29%에 그쳤습니다([출처: 로튼 토마토](https://www.rottentomatoes.com)).).) 평론가들이 주로 지적한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한때 작은 영화를 살리는 이름이었던 그가, 이 시기에는 오히려 작품의 약점으로 지적받았다는 사실이 씁쓸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영화를 찍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화면을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액션 연출: 총은 많은데 시원하지 않은 이유
액션 영화를 고를 때 저는 촬영 방식을 꽤 따집니다. 아무리 총소리가 요란해도, 화면이 정신없으면 보는 맛이 없거든요.
포트리스 더 벙커의 액션 장면에서는 핸드헬드 카메라(Handheld Camera) 기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핸드헬드 카메라란 카메라를 손에 들고 촬영하는 방식으로, 의도적인 흔들림이 긴박감과 현장감을 높이는 데 쓰입니다. 본래는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유효한 기법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흔들림이 과하게 적용된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누가 누구와 싸우는 건지, 어느 방향에서 총이 날아오는 건지 파악이 안 되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거든요.
제가 경험상 느낀 또 다른 문제는 적들의 전술적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야기상 발라지는 로버트를 오랫동안 추적한 정예 공격대를 이끄는 인물인데, 막상 화면에서는 부하들이 너무 쉽게 쓰러집니다. 반대로 주인공 쪽은 위기에서 매번 운 좋게 빠져나옵니다. 이런 장면이 반복되면 서사적 개연성(Narrative Plausibility), 즉 관객이 "이 상황이라면 실제로 이렇게 되겠다"라고 납득하는 감각이 무너집니다.
악역 바라지를 연기한 채드 마이클 머레이는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생기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두 주인공의 인상이 옅어진 자리를 그가 채워주는 구조였는데, 그게 이 영화의 기묘한 역설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분께 맞는 영화, 이런 분께는 비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가 정리해 본 기준은 이렇습니다.
포트리스 더 벙커가 잘 맞는 상황:
- 비 오는 주말 오후,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싶을 때
- 브루스 윌리스의 필모그래피를 쭉 따라온 팬으로, 그의 마지막 활동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분
- 탄탄한 각본보다 총소리와 빠른 전개 자체를 즐기는 분
반면 탄탄한 시나리오와 몰입도 높은 액션 연출을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화 산업 전문 매체인 버라이어티(Variety)도 이 시기 윌리스가 짧은 기간에 비슷한 저예산 영화에 연달아 출연한 패턴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출처: Variety](https://variety.com)).).) 같은 시기 만들어진 유사한 작품들과 비교해도, 이 영화가 특별히 앞서는 부분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이 작품이 시리즈 1편이고, 이후 포트리스: 스나이퍼스 아이라는 후속편도 나왔다는 점은 알아두면 좋습니다. 이 편이 괜찮았다면 이어서 보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결국 포트리스 더 벙커는 저에게 즐거움보다 아쉬움이 더 진하게 남은 영화였습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의 마지막 흔적을 따라가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 작품이랄까요. 기대를 낮추고 편안하게 틀어두기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이상을 바란다면, 아마 저처럼 중반부터 시계를 들여다보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