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을 잃은 남자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살인이라면,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영화관을 나오면서 한참을 그 질문 앞에 멈춰 섰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바로 그 불편한 질문을 2시간 내내 관객 앞에 밀어붙이는 영화입니다.
해고 트라우마 — 장어 선물이 도끼였다
영화는 바베큐 연기 자욱한 마당에서 시작됩니다. 유만수와 가족이 웃고 떠드는 장면인데, 그 행복이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불안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아는 감각입니다. 뭔가 너무 잘 풀린다 싶은 날에는 꼭 다음 날 뒤통수가 날아오더라고요.
회사가 건넨 장어 선물이 사실은 해고의 전조였다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웃음이 나왔는데 마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영화가 활용하는 장치가 바로 블랙 코미디(black comedy)입니다. 블랙 코미디란 비극적이거나 불편한 현실을 유머로 포장해 관객에게 웃음과 불쾌함을 동시에 유발하는 서사 기법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기법을 유만수의 해고 장면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밀고 갑니다.
유만수가 해고된 이유는 미국계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의 인수로 인한 구조조정입니다. 사모펀드란 소수의 투자자에게서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하고 수익을 극대화한 뒤 되파는 투자 구조를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경력이 긴 직원이 1순위 희생양이 되는 일은 현실에서도 드물지 않습니다. 영화가 이 배경을 차갑게 깔아두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분노를 자극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고, 그냥 그게 세상이라는 듯 담담하게 제시합니다.
해고 이후 유만수의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영화는 꽤 촘촘하게 쌓아 올립니다. 3억이 넘는 대출, 팔아야 할 집에 대한 집착, 재취업 실패가 반복되면서 생기는 자존심의 균열. 이 부분이 저는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영웅적인 고통이 아니라, 너무 익숙한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블랙코미디 — "어쩔 수 없다"는 말의 무서운 속뜻
유만수가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장르적 긴장감을 높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조용하고 무거운 드라마일 거라고만 생각했거든요. 막상 보니 살인 계획과 어설픈 실행,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연민이 뒤엉키면서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유만수가 구사하는 방식 중 하나가 허위 구인 광고입니다. 가짜 채용 공고를 내서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받아 등급을 매기는 장면은 실소가 나오면서도 소름이 돋았습니다. 여기서 영화가 묘사하는 것은 단순한 범죄 계획이 아닙니다. 이건 미장센(mise-en-scène)의 영역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 조명, 공간, 배우의 위치 — 를 통해 감독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출 방식을 뜻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유만수의 집이 기울어가고 공간이 좁아지는 시각적 연출로, 인물의 내면이 무너지는 과정을 말 없이 보여줍니다.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분명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진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폭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주문인가. 제 경험상 이 질문은 영화 속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었어"라는 말이 진심인지,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 경계를 아주 끈질기게 파고듭니다.
이 영화의 서사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맥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원작: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을 박찬욱 감독이 한국 현실에 맞게 각색
- 수상 이력: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음
- 장르적 특성: 블랙 코미디이면서 동시에 사회 비판적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겸비
- 배경 설정: 사모펀드 인수로 인한 구조조정이라는 현실적 공포를 서사의 출발점으로 삼음
이병헌이 연기한 유만수는 이른바 취약한 알파 메일(alpha male)의 초상입니다. 알파 메일이란 집단 안에서 주도적이고 강한 역할을 맡는 남성 유형을 가리키는 말인데, 영화는 그런 남자가 역할을 잃었을 때 얼마나 빠르게 무너지는지를 이병헌의 표정 하나하나로 담아냅니다. 공감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왜 그 선택을 했는지는 이해가 되도록 만드는 연기입니다. 이건 배우의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도 저는 오래 남았습니다. 남편의 해고에 침착하게 반응하고, 집을 팔아 대출을 갚자고 제안하는 현실주의적 면모. 그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회복력. 그 캐릭터가 영화의 정서적 중심이 되는 이유를 제가 직접 보면서 느꼈습니다.
박찬욱 — 건축 미학으로 읽는 시대의 공포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건축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공간 자체가 이야기가 됩니다. 《어쩔 수가 없다》에서 새 남자의 저택은 중년 남자의 로망이자 동시에 고립과 과시욕, 비밀을 품은 공간으로 기능합니다. 제가 직접 그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건, 이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을 대사가 아니라 공간으로 먼저 꺼낸다는 점이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불 꺼져가는 공장에서 면접 합격 소식을 듣고 유만수가 쾌재를 부르는 장면은 뼈아프게 슬픕니다. 그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것을 얻었는데, 왜 그 장면이 기쁘지 않은가. 그 질문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 남았습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불안은 단지 중년 가장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향후 10~20년 내 국내 직업의 상당 부분이 자동화와 AI로 대체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분석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고용정보원). 노동의 의미가 흔들리는 시대에 유만수의 이야기는 먼 미래의 공포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 많은 이들이 느끼는 존재론적 위기(existential crisis)와 맞닿아 있습니다. 존재론적 위기란 자신이 누구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심리적 붕괴 상태를 말합니다. 직업을 잃는다는 것이 단순히 수입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가 되는 순간,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이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통계청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40~50대 중장년층의 비자발적 이직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재취업에 1년 이상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통계청). 유만수의 이야기는 스크린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보고 나서 쉽게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화려한 액션도, 통쾌한 반전도 없지만 영화관을 나온 뒤 제 머릿속에 가장 오래 남은 건 유만수의 얼굴이었습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라는 말이 얼마나 무섭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조용히 증명합니다. 긴장감 있는 오락 영화를 원하는 분께는 다소 무거울 수 있지만, 살아가면서 한 번쯤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삼켜본 적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꽤 오래 마음에 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