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회만 보고 자야지" 하고 틀었다가 새벽 세 시가 된 적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더 글로리가 딱 그랬습니다. 다음 날 출근을 앞두고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이 드라마가 단순한 복수극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제가 직접 봐보니 그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복수극이라기보단 한 인간의 생존기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 피해자 문동은이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고등학생 시절 박연진 패거리에게 고데기로 팔을 지지는 등 극심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당합니다. 이 장면들은 보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렸고, "이게 드라마라 이 정도지, 현실이었다면" 하는 생각에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어요.
드라마가 다루는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바로 트라우마(trauma)입니다. 트라우마란 강렬한 충격적 사건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지속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를 의미하며, 단순한 나쁜 기억과는 다릅니다. 동은이 불 앞에서 굳어버리거나, 삼겹살 굽는 냄새에 반응하는 장면들이 바로 이 트라우마의 증상을 정교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일상 속에서 이런 반응을 겪는다는 건 실제 연구로도 뒷받침됩니다. 학교폭력 피해 경험은 우울, 불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 장기적인 정신건강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https://www.nypi.re.kr)).).)
일반적으로 복수극은 주인공이 직접 주먹을 휘두르거나 소리를 지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다릅니다. 동은은 바둑의 포석(布石)처럼 움직입니다. 포석이란 바둑에서 초반부에 돌을 배치하여 후반전의 유리한 지형을 만드는 전략을 뜻합니다. 동은이 수십 년에 걸쳐 바둑을 배우고, 교사 임용에 도전하고, 가해자들 각각의 약점을 조용히 확보해 나가는 방식이 정확히 이 포석의 과정입니다. 그 오랜 시간이 쌓여 있다는 걸 알기에,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연기력이 드라마를 살렸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송혜교 배우에게 이 정도의 연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전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이미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웃는 표정인데 전혀 따뜻하지 않고, 조용히 말하는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그 연기.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바둑돌 하나를 놓는 장면입니다. 대사도 없고 동작도 작은데, "이 사람 지금 엄청나게 화나 있구나"가 그대로 전해졌어요. 이걸 두고 표정 연기(facial acting)라고 부르는데, 대사 없이 얼굴 표정과 눈빛만으로 캐릭터의 내면 상태를 전달하는 연기 기법을 말합니다.
임지연 배우가 맡은 박연진도 빠질 수 없습니다. 화면에 나올 때마다 "아, 정말..." 하고 혼자 중얼거렸거든요. 예쁜 얼굴로 웃으면서 남을 짓밟는 그 모습이 너무 리얼해서 오히려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악역 캐릭터의 입체성은 드라마 전체의 서사 밀도(narrative density)를 결정합니다. 서사 밀도란 이야기 안에 감정적 갈등과 캐릭터의 행동 동기가 얼마나 촘촘하게 쌓여 있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박연진이라는 캐릭터가 단순한 악인을 넘어서 자기 합리화의 논리를 가진 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에 이 드라마의 서사 밀도는 상당히 높습니다.
더 글로리가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서는 이유로 제가 꼽고 싶은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강현남(염혜란 분)이라는 캐릭터: 가정폭력 피해자이면서 동은의 조력자가 되는 인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는 서사를 보여줍니다.
- 경란의 존재: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방관자였던 경계선 위의 인물로, 학교폭력의 구조적 복잡성을 드러냅니다.
- 주여정과의 관계: 복수에만 집중하는 동은이 처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읽어내는 장면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입니다.

통쾌함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서사구조
더 글로리 파트 2는 전 세계 넷플릭스 TV 쇼 부문 1위를 기록했습니다. 파트 1이 아시아권에서만 강한 공감대를 얻었던 반면, 파트 2의 복수 전개는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통했다는 평가입니다([출처: 넷플릭스 공식 사이트](https://www.netflix.com)).).) 그 숫자만 보면 완벽한 드라마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파트 2로 넘어가면서 서사 템포(narrative tempo)가 급격히 빨라졌거든요. 서사 템포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속도를 의미하는데, 파트 1에서 그렇게 촘촘하게 쌓아 올린 긴장감이 파트 2에서는 너무 빠르게 풀려버렸습니다. 가해자들의 비밀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서로 물고 뜯기 시작하는 속도가 감정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어요.
일반적으로 복수극에서 가해자들은 주인공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쓰러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직접 보니 이 드라마에서 가해자들은 오히려 스스로 자멸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부자에 권력까지 가진 사람들이 너무 쉽게 멍청한 실수를 반복했어요. 악역이 똑똑해야 주인공의 복수가 더 빛난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분명히 빈틈이었습니다.
주여정 캐릭터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잘생기고 돈도 많고 성격도 완벽하며 동은을 한결같이 지켜주는 인물인데, 결점이 없다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마치 고통받은 주인공에게 보상처럼 배치된 인물 같았달까요. 캐릭터에 내적 갈등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훨씬 입체적이었을 겁니다.
더 글로리가 정말 잘한 것과 아쉬웠던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잘한 것: 트라우마 묘사의 정교함, 두 주연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력, 복수가 느리고 조용하게 진행되는 구성
- 아쉬운 것: 파트 2의 급격한 서사 템포, 스스로 자멸하는 악역들, 너무 완벽한 조력자 캐릭터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며칠 동안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지하철 안에서도, 밥을 먹다가도 문득 동은이 얼굴이 떠올랐어요. 좋은 드라마라는 건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완벽한 드라마라고 하기엔 빈틈이 분명히 보이지만, 그럼에도 더 글로리는 한 번쯤 마음을 크게 두드리는 작품입니다. 학교폭력이라는 주제를 이만큼 진지하게 다룬 드라마가 최근에 얼마나 있었는지 돌아보면, 이 드라마의 의미는 시청률과 별개로 분명합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주말에 시간 잡고 보시길 권합니다. 다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생각보다 마음이 무거워질 수 있으니, 그 준비만 하고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