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라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하얼빈은 그 기대를 정면으로 배신합니다. 팝콘도 반쯤 남긴 채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정이 감동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 아쉬운 탓인지, 극장을 나오는 내내 정리가 안 됐습니다. 그 혼란스러운 감상을 솔직하게 풀어봤습니다.
영상미 하나만큼은 압도적입니다
우민호 감독이 이번에 꺼내든 카드는 ARRI 65 카메라입니다. ARRI 65란 대형 포맷 필름 카메라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된 고해상도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로, 영화 듄 시리즈에도 사용된 장비입니다. 쉽게 말해 일반 상업 영화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가격과 운용 난이도가 모두 높은 기기라는 뜻입니다. 총 제작비 300억 원이 투입된 이 작품은 한국 영화 최초로 아이맥스 독점 화면비인 1.90대 1을 지원합니다.
제가 용산 아이맥스에서 직접 봤을 때, 화면이 열리는 순간 감탄이 먼저 나왔습니다. 몽골 사막의 광활함과 라트비아 로케이션에서 담아낸 눈보라 장면은 그냥 아름다운 수준을 넘어섭니다. 여기서 로케이션 촬영이란 실제 해당 국가 현지에서 직접 촬영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세트나 CG로 대체하지 않고 실제 지형과 기후를 담아낸 덕분에 화면에서 질감이 살아있습니다.
놀라운 건 야외 장면만이 아니었습니다. 실내 대화 씬에서도 조명 설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초반 눈보라 속 작전 회의 장면은 빛의 방향과 그림자만으로 인물들의 긴장감을 표현했는데, 이런 연출은 영상미가 단순 스펙터클이 아니라 서사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홍경표 촬영 감독이 참여한 이유가 화면 곳곳에서 느껴졌습니다. 기생충으로 각광받은 그의 스타일이 이번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살아있었습니다.
하얼빈의 기술적 완성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ARRI 65 카메라 촬영: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대형 포맷 화질 구현
- 아이맥스 화면비 1.90대 1: 국내 영화 최초 적용,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화면이 위아래로 더 넓게 열림
- 몽골·라트비아 현지 로케이션: CG 의존 없이 실제 지형과 기후를 그대로 담아낸 생생한 배경
-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장면마다 과하지 않게 긴장감을 받쳐주는 사운드 설계
배우들 연기도 전반적으로 안정적이었습니다. 무대 인사에서 직접 봤을 때 현빈 배우의 체형 변화가 눈에 띄었는데, 스크린에서도 그 무게감이 전달됐습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조우진의 연기였습니다. 본인 필모그래피 통틀어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이동욱의 특별 출연도 짧지만 강렬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역을 맡은 릴리 프랭키는 나오는 장면이 많지 않음에도 정적인 카리스마 하나로 화면을 압도했습니다.
아쉬운 점,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보면서 솔직히 중간에 졸음이 밀려오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담백한 연출을 추구한다는 건 이해합니다. 신파를 배제하고 차갑고 건조하게 가겠다는 의도도 읽힙니다. 그런데 담백함과 공허함은 분명히 다릅니다. 클로즈업도, 명대사도, 장엄한 감정선도 의도적으로 걷어냈다면, 그 빈자리를 채울 무언가가 있어야 했는데 하얼빈에서는 그게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아쉬운 건 캐릭터 밀도입니다. 독립투사들 사이의 앙상블, 즉 인물들이 서로 부대끼며 만들어내는 관계의 질감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 앙상블이란 영화에서 여러 인물이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시너지를 내는 구도를 뜻합니다. 하얼빈에서는 우덕순, 김상현, 공부인, 이창섭이 각각의 사연을 안고 있지만 서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감정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밀정 에피소드, 가족의 복수 같은 장치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깊이 파고들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영화 심리학 분야의 연구에 따르면, 관객이 인물에 감정이입하려면 인물이 위기 상황에서 선택하는 장면, 혹은 평범한 일상의 단편이 필요합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https://www.kofic.or.kr)).).) 하얼빈은 그 두 가지 모두 의도적으로 경계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인물들이 살아있다기보다는 배치된 느낌이 납니다.
안중근 의사의 내면 묘사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같은 우민호 감독의 전작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던 방식이 이번엔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고뇌와 갈등이 화면에서 특별하게 살아나지 못한 채 흘러갔습니다. 차라리 조우진이 안중근을 연기했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까지 잠깐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조우진이 연기한 가상 인물에 무게가 실렸고, 역설적으로 실존 인물인 안중근의 존재감이 희석되어 보였습니다.
국내 영화 관람 만족도 조사를 보면, 관객이 역사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는 요소는 '인물의 인간적 면모'가 1위를 차지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관객 조사](https://www.kofic.or.kr)).).) 하얼빈이 영상미와 기술적 완성도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서도 관람 후 뜨거운 여운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건, 못 만든 영화는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1시간 53분 내내 지루하지 않고 집중이 유지됩니다. 영상미와 사운드 설계 면에서는 국내 상업 영화 중 최상위권에 놓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얼빈은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보는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단, 뜨거운 감동보다는 차갑고 단단한 여운을 기대하고 가시는 편이 훨씬 맞을 것입니다. 기대치를 조율하면 후회는 없을 영화입니다. 저는 조우진과 릴리 프랭키의 연기, 그리고 기차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입장료 값을 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