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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다 재우고 나서야 겨우 내 시간이 생기는 날, 남편이랑 야식 앞에 두고 틀었던 영화가 <승부>였습니다. 바둑 영화라기에 조금 무거울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화면만 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2025년 3월 극장 개봉 후 넷플릭스로 공개된 이 작품, 단순한 스포츠 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실화가 주는 무게감 — 조훈현과 이창호의 진짜 이야기
혹시 영화를 보기 전에, 이게 실화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저는 사실 반쯤 잊고 틀었다가 자막에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라는 문구를 보고 등을 곧추세웠습니다. 픽션과 논픽션은 보는 눈이 달라지거든요. 화면 속 긴장이 그냥 연출이 아니라 누군가의 실제 삶이었다는 감각이, 감정의 밀도를 확실히 높여줬습니다.
<승부>는 한국 바둑계의 전설적 라이벌 구도인 조훈현-이창호 사제 관계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조훈현은 1980~90년대를 호령했던 대국(對局), 즉 바둑에서 두 사람이 맞붙는 대결의 절대 강자였고, 이창호는 그가 직접 키운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는 바로 그 균열의 순간부터 시작합니다.
연출은 김형주, 각본에는 윤종빈이 참여했습니다. 이병헌이 조훈현을, 유아인이 이창호를 연기합니다.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배우들이 한 화면에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대치가 꽤 올라갔는데,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고창석까지 합류하니 스크린 밀도가 남달랐습니다.
- 개봉: 2025년 3월 극장 → 같은 해 5월 넷플릭스 공개
- 연출·각본: 김형주 / 공동 각본: 윤종빈
- 주연: 이병헌(조훈현 역), 유아인(이창호 역), 고창석
- 배경: 1980~90년대 한국 바둑계 실화
이병헌의 침묵 — 승부사의 자존심은 말이 아니라 눈빛으로 말한다
이병헌이 어떻게 조훈현을 표현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저는 이 배우가 몸을 쓰는 장면보다 가만히 앉아 있는 장면에서 더 무서운 배우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영화가 딱 그걸 증명했습니다. 바둑판 앞에 앉아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 하나로, 저는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걸고 저기 앉아 있는지 느껴졌습니다.
바둑에는 기세(氣勢)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기세란 단순히 돌의 배치가 아니라, 대국 전체의 흐름을 주도하는 심리적·전술적 우위를 뜻합니다. 고수들은 착수(着手), 즉 돌을 놓는 행위 하나에 상대의 기세를 꺾으려는 의도를 담는다고 합니다. 이병헌은 그 기세의 무게를 대사 없이 표정으로 표현해 냈고, 저는 그게 이 영화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유아인의 이창호는 다른 결을 가집니다. 스승의 기세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조용히 스며들 듯 이기는 방식입니다. 바둑 용어로 치면 포석(布石)에 해당하는 접근입니다. 포석이란 대국 초반 돌을 배치하며 판 전체의 방향을 정하는 단계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승패를 결정짓는 뿌리가 됩니다. 두 배우의 연기 스타일이 각자 맡은 인물의 바둑 방식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대교체의 쓴맛 — 내가 키운 자리에 내가 밀려나는 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바둑 이야기를 보러 갔다가 직장 생활 기억이 통째로 떠오를 줄은 몰랐거든요. 제가 회사에 다니던 시절, 제가 챙기고 가르치던 후배가 저를 제치고 먼저 승진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분하고 억울해서 천장만 바라보며 한숨도 못 잤습니다. 조훈현이 제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패배를 곱씹는 대목에서, 그 밤의 감각이 그대로 되살아났습니다.
세대교체(世代交替)라는 단어는 뉴스에서 들을 때는 그냥 흘러갑니다. 여기서 세대교체란 단지 나이 차이를 넘어, 한 사람이 쌓아온 지위와 역할을 더 젊은 세대에게 내어주는 구조적 전환을 뜻합니다. 그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직접 키운 사람에게 일어날 때 그 무게는 완전히 다릅니다. 영화는 그 감각을 바둑판이라는 구체적인 공간 위에서 보여줍니다.
다만 제가 아쉬웠던 건, 스승이 무너지는 과정이 생각보다 빨리 정리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진짜 승부사라면 저렇게 순순히 자리를 내줄 사람이 아닌데, 하는 답답함이 오래 남았습니다. 물론 그 담담함이 영화가 말하려는 내려놓음의 정서라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조금 더 치열하게 그려졌다면 여운이 한층 짙어졌을 것 같습니다. 야식이 다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조훈현은 국내외 통산 우승 160회 이상을 기록한 바둑계의 독보적 존재였으며(출처: 한국기원), 이창호는 10대 때부터 그 아성에 도전해 결국 스승을 넘어선 기록적인 기사(棋士)입니다. 기사란 바둑을 직업으로 삼아 공식 대회에서 경쟁하는 전문 선수를 뜻합니다. 이 두 사람의 실제 역사를 알고 나서 영화를 보면 감정의 층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 스승에게 배운 자가 스승을 이기는 순간 — 배신인가, 성장인가
- 패배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그 사람의 크기를 보여준다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
- 제가 직접 겪었던 "내가 키운 자리에 밀려나는 경험"과 정확히 겹쳤던 장면
진다는 것의 의미 — 이 영화가 끝내 묻는 질문
이긴 사람의 이야기는 많습니다. 하지만 진 사람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를 이렇게 정면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승부>는 조훈현이 패배를 받아들이고 다시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결국 "진다는 것이 끝인가, 아닌가"를 독자에게 던집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 질문이 한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바둑에는 복기(復棋)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복기란 대국이 끝난 뒤 처음부터 돌을 다시 놓아보며 어디서 실수했는지, 어떤 수가 더 좋았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과정입니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앉아 자신의 패인과 상대의 묘수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이 의식은, 제가 보기에 이 영화 전체의 정서와 닮아 있습니다. 지고 나서 다시 그 판을 들여다보는 용기, 그게 이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KOBIS) 자료에 따르면 <승부>는 2025년 극장 개봉 당시 한국 영화 중 상위권 박스오피스를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 스포츠 실화 장르가 꾸준히 관객과 공명하는 이유는, 결국 그 안에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느낀 것도 바둑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였으니까요.
한 가지만 더 드리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혹시 지금 어떤 자리에서 밀려나는 느낌을 받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 영화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건드릴 수 있습니다. 좋은 의미로요. 제 경험상, 이런 영화는 혼자보다 누군가와 함께 보고 나서 나누는 대화가 더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찾으면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대단한 준비 없이 야식 하나 차려두고 틀어도 충분히 빠져드는 영화입니다. 바둑을 모른다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바둑 규칙 하나 모르지만, 이 영화에서 제가 알아야 할 건 착수의 기술이 아니라 패배를 끌어안는 사람의 표정이었으니까요. 보고 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가장 뼈아프게 졌던 순간이 언제야?"라고 한번 물어보세요. 의외로 긴 대화가 시작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