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라이언 고슬링이 나온다는 것 하나만 보고 틀었는데, 총격전보다 조직이 사람을 버리는 방식이 더 오래 머릿속에 남더군요. 넷플릭스 액션 영화라고 하면 보통 가볍게 보고 잊힌다는 말이 많은데, 저는 이 영화가 던진 질문 하나를 한동안 놓지 못했습니다.
쓰임과 폐기 — 화면 밖에서 먼저 겪은 이야기
일반적으로 첩보 액션 영화는 스파이가 얼마나 멋지게 임무를 완수하느냐에 방점을 찍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달랐습니다. 영화의 제목 자체가 이미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레이맨(Gray Man)'이란 군중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존재, 즉 눈에 띄지 않고 기억되지 않도록 훈련된 요원을 뜻합니다. CIA가 비밀리에 육성한 자산(asset)인 코트 젠트리가 조직의 치부를 쥐게 되는 순간, 어제까지의 고용주는 오늘의 사냥꾼으로 돌변합니다. 여기서 자산(asset)이란 정보기관 용어로, 조직이 목적 달성에 활용하는 인적 자원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사람을 도구로 분류하는 개념입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보면서 손이 멈췄습니다. 회사 다니던 시절이 겹쳐 떠올랐거든요. 감당하기 벅찬 업무 지시가 끝없이 내려오고 몸과 마음이 바닥을 치던 시기, 돌아온 말은 "그럴 거면 나가라"는 식의 한마디였습니다. 여태 갈아 넣은 시간이 어디로 갔나 싶었고, 사람을 이렇게 쉽게 버리는구나 하는 서늘함이 가슴 한구석에 오래 남았습니다. 화면 속 젠트리가 쫓기는 모습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영화는 폐기 처분(termination order)이라는 개념을 꽤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폐기 처분이란 조직이 더 이상 통제하기 어렵거나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요원을 제거 대상으로 분류하는 절차입니다. 쓸모가 있을 때는 자산이라 부르다가, 거추장스러워지는 순간 가장 먼저 표적으로 삼는 시스템의 냉정함. 거대한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냉기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루소 형제 감독은 2022년 넷플릭스를 통해 이 작품을 공개했고, 당시 제작비는 약 2억 달러로 넷플릭스 역대 최고 수준이었습니다(출처: Variety).
- 그레이맨: 군중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존재 자체를 지우도록 훈련된 CIA 비밀 요원 코드명
- 자산(asset): 정보기관이 임무에 활용하는 인적 자원 — 효용이 있을 때만 유효한 분류
- 폐기 처분(termination order): 위협 요소로 분류된 요원에 대한 제거 명령 — 충성과 효용이 끝난 후의 결말
액션과 캐릭터 — 믿었던 공식이 반쯤 맞았던 이유
일반적으로 루소 형제 연출이라고 하면 마블의 앤트맨, 캡틴 아메리카를 거친 검증된 액션 감독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저도 그 믿음을 가지고 재생 버튼을 눌렀고, 그 부분만큼은 기대가 틀리지 않았습니다. 장면 전환 속도, 카메라 워킹, 총기 전투 시퀀스 — 한 장면이 끝나기 무섭게 다음 장면이 밀려오는 편집 리듬은 확실히 몰입을 잡아당깁니다. 라이언 고슬링과 크리스 에반스가 각각 쫓기는 자와 쫓는 자로 맞서는 구도는, 배우 두 명의 존재감만으로도 화면을 꽉 채웁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지점에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화려한 액션 시퀀스(action sequence) — 즉 연속된 장면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편집 단위 — 는 분명히 훌륭합니다. 문제는 그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를 채워야 할 캐릭터의 무게가 생각보다 가볍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의 사연이 충분히 쌓이지 않아, 누가 왜 움직이는지에 마음이 깊게 실리지 않습니다. 멋진 장면은 많은데 오래 남는 장면이 적은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원작은 마크 그리니의 동명 소설로, 소설에서는 젠트리의 내면과 과거가 훨씬 촘촘하게 묘사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밀도를 영화가 다 담아내지 못한 것은 러닝타임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액션 밀도를 우선한 선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영화 비평 집계 사이트 로튼 토마토 기준 비평가 점수는 40%대에 머물렀지만 관객 점수는 90%에 가까웠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비평가와 관객의 평가가 갈리는 전형적인 구조인데, 제가 보기엔 그 간극이 바로 '캐릭터 깊이 vs. 오락적 쾌감' 사이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큼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배우들의 존재감이 빈자리를 상당 부분 메워 줍니다. 라이언 고슬링 특유의 건조하고 담담한 표정이 '지워진 인간'이라는 역할에 묘하게 잘 맞았고, 크리스 에반스가 연기하는 악역은 과하게 연출된 편이지만 그 과함이 오히려 분리된 긴장감을 만들어 냈습니다. 캐릭터에 더 공을 들였다면 훨씬 묵직한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오락 영화로서 끝까지 즐겁게 봤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정리하면, 이 영화는 첩보 액션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서 꽤 서늘한 질문을 꺼냅니다. 쓰임이 다한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저는 이 질문이 스크린 밖을 향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회사든 조직이든 누군가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건드릴 수밖에 없는 지점입니다. 순수하게 오락 영화로 즐겨도 충분하고,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은 분이라면 그 질문을 붙들고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